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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난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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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주승현 박사의 인생 역정을 읽다보면
세상에 못 이룰 일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용기가 난다!'
- 장강명 / 소설가

25분 만에 비무장지대를 건너 10년 만에 박사모를 쓴,
그러나 지금도 ‘사선’을 건너고 있는 한 조난자의 비망록


2002년, 저자 주승현은 비무장지대에서 북측 심리전 방송요원으로 복무하다 휴전선을 넘어 한국에 왔다. 휴전선을 건너는 데에는 불과 25분이 걸렸지만, 그날 착종된 트라우마는 10년 넘게 저자를 괴롭혔다. 그는 지금도 비무장지대의 한가운데에서 지뢰를 밟고 서 있는 고약한 악몽에 시달린다. 그리고 그는 오늘도 ‘사선 너머의 사선’을 건너고 있다. 탈북민을 향한 한국사회의 편견과 차별, 배제와 싸우며 저자는 통일학 박사가 되어 통일 문제를 연구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 책은 25분 만에 비무장지대를 건너 10년 만에 통일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주승현 박사의 자전적 에세이이면서도 우리의 뒤틀린 현대사와 일그러진 맨 얼굴을 보여주는 슬픔의 책이다. 탈북민인 그는 스스로를 ‘조난자’로 부른다. 조난자는 항해 중에 재난을 만난 사람을 의미한다. 저자에게 탈북민은 한반도의 분단 역사라는 재앙을 맞아 난파된 자를 말한다.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한국사회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 3만 명의 탈북민들과 1945년 해방 직후부터 현재까지 남과 북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부유하는 존재로 살아가는 ‘한반도의 조난자들’을 호명해낸다.

목숨을 걸고 탈출하는 사람들

2017년 11월 13일, 북한군 병사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내 군사분계선을 넘어오는 일이 벌어졌다. 북한군 추격조로부터 총격을 맞고 군사분계선에서 불과 50미터 떨어진 곳에 쓰러진 그는 유엔군 헬기로 긴급 후송되었다. 그의 탈출 영상뿐 아니라 치료 경과와 내장 상태까지 전국으로 중계되어 많은 논란을 빚었다. 그날 이후, 저자는 많은 언론사들로부터 인터뷰 요청을 받았다. 그도 십여 년 전 인근의 비무장지대에서 복무했으며 비슷한 경로로 탈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모든 인터뷰 요청을 거절했다. 언론이 진실을 원한다기보다는 그저 그를 이용하고 있다는 불온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에서 살아오면서 체득한 의심이었고 불안이었다.

저자는 하루 24시간도 모자란 듯이 남북한이 서로를 향해 고성능 확성기로 심리전 방송을 내보내며 격돌하던 90년대 후반부터, 갑자기 남북 간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던 2000년대 초반까지 북측 비무장지대에서 복무했다. 그는 도라산역이 착공되고 완공되는 과정을 북측 지역에서 지켜보았다. 장교가 되기 위해 군관학교를 준비하던 어느 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과 군관학교 입학이 보류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저자는 갈등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봉쇄해야 할 남측의 심리전 방송이 도리어 한줄기 희망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마침내 저자는 목숨을 걸고 탈북을 결행하였다.

대북 확성기에서 말해주지 않던 또 다른 한국사회의 모습

하나원에서 탈북민 정착프로그램을 이수하고 한국사회에 나온 직후, 저자는 자신의 운명이 다시 사선 앞에 놓여 있음을 직감했다. 한국군의 대북 확성기는 또 다른 한국사회의 모습은 충분히 말해주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힘겹게 일식당에 취직했지만 남들보다 궂은일을 도맡아 더 많이 일해도 월급은 더 적게 받았다. 하나원에서 '한국은 북한과 달라서 일한 만큼 돈을 벌 수 있다'라고 배웠지만 현실은 달랐다. ‘노력과 대가는 비례한다’는 상식조차 탈북민에게는 예외였다.

일식집에서 첫 월급을 받던 날, 저자는 대학을 가야겠다고 결심하였고 월급의 절반을 투자해 입시학원에 등록하였다. 대학 생활도 결코 쉽지 않았지만 저자는 한 번의 휴학도 없이 대학을 졸업하였다. 저자는 대학 졸업 후 여러 기업과 국회 등에서 일하면서 석·박사 학위를 마치고 마침내 통일학 박사가 된다. 대학에 입학한 지 정확히 10년 만의 일이었다.

통일부는 2017년 10월까지 대한민국에 입국한 탈북민이 3만 1,093명이라고 발표했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한국에 왔지만, 그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다시 한국을 떠난다(탈남). 일각에서는 대략 5,000명의 탈북민이 탈남했거나 탈남했다가 돌아온 것으로 추정한다. 탈남한 이들 중 일부는 다시 북한으로 돌아간다(재입북). 그들은 왜 한국을 떠나는 것일까. 그리고 왜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는 것일까. 이 책은 저자의 개인사를 풀어놓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우리가 흔히 ‘먼저 온 통일’이라고 부르는 탈북민들이 겪고 있는 힘겹고 고달픈 삶을 발견하게 된다. 저자는 장강명 작가의 소설 [우리의 소원은 전쟁]을 감수하기도 하였는데, 장강명 작가는 이 책 [조난자들]을 읽고 다음과 같이 추천사를 썼다.

'북한, 통일, 탈북민 사회에 관심이 있다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소수자를 소외하고 차별하는 모습에 분노하고 부끄러워한 적이 있다면 역시 읽어야 한다. 한국의 뒤틀린 현대사와 일그러진 맨 얼굴을 감당하고 어려운 숙제를 받아들일 각오가 있는 이들에게 권한다.'
- 장강명 / 작가
('추천사' 중에서)

한반도의 조난자들, 어쩌면 우리의 이야기

이 책의 2부는 한반도의 조난자들을 다룬다. 그들은 1945년 해방 직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남과 북,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이들로, 비단 탈북민만이 아니다. 이 책은 제주 4·3 사건의 학살을 주도했던 서북청년단부터, 최인훈의 소설[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처럼 자유를 찾아 남과 북을 떠나는, 혹은 떠나지 못한 채 고통받는 자유인들, 북한으로 떠나는 만경봉호에 오른 북송 재일동포들과 정대세를 비롯한 그 후예들,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중간첩 이수근, 독일 망명자였다가 북한으로 들어간 후 다시 탈북하여 한국에서 살고 있는 오길남, 주체사상의 입안자였으나 비운의 망명객으로 쓸쓸하게 세상을 떠난 황장엽, 그리고 오늘날 탈북과 탈남과 재입북을 반복하는 이들의 이야기까지 담아낸다.

이들 조난자들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통일을 이루지 않고서는 우리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잠재적인 조난자의 운명을 배면(背面)에 깔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그렇다면 '이 책은 탈북민 한 사람의 고백이기도 하지만, 분단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여러 구성원들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할 것이다.

추천사

탈북민의 삶을 얼마간 안다고 여겼는데 책을 읽으며 깊이 반성했다. 주승현 박사는 그들이 하나의 이야기로 묶이지 않음을 먼저 보여준다. 사람마다 사연과 처지가 너무나 다르고, 원하는 바가 다르며, 분개하는 지점도 다르다. 그리고 나를 포함해 남한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그걸 지독히도 모른다. ‘왜 우리한테 감사해하지 않아?’ 하고 궁금해할 정도로.
북한, 통일, 탈북민 사회에 관심이 있다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소수자를 소외하고 차별하는 모습에 분노하고 부끄러워한 적이 있다면 역시 읽어야 한다. 한국의 뒤틀린 현대사와 일그러진 맨 얼굴을 감당하고 어려운 숙제를 받아들일 각오가 있는 이들에게 권한다. 그런데 저자의 인생 역정을 읽다보면 ‘세상에 못 이룰 일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용기가 난다.
- 장강명 / 소설가

목차

서문

1부. 사선을 넘어 다시 사선으로
1. 스물두 살, 경계를 넘다
2. 사선을 넘어 또 다른 사선에 서다
3. 실업과 호구지책의 사이
4. 대학, 청춘의 죽음
5. 미생의 삶, 경쟁사회의 아웃사이더
6. 분단 사회의 아웃사이더
7. 25분 만에 귀순하여 십 년 만에 쓴 박사모
8. 자유를 찾아 떠나는 디아스포라
9.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
10. 통일,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소원11. 다시 자유를 찾아서

2부. 한반도의 조난자들
12. 1940년대와 오늘: 서북청년단이란 유령
13. 1950~1960년대: ‘밀실’과 ‘광장’ 사이의 자유인들
14. 1960년대 이후: 만경봉호에 오른 북송 재일동포
15. 1960~1970년대: 이중간첩 이수근
16. 1980년대: 오길남, 오! 혜원, 규원
17. 1990년대: 황장엽, 비운의 망명객
18. 2000년대: 탈북과 재입북 사이의 조난자들

맺는말
감사의 말

본문중에서

2017년 11월 13일, 북한군 병사 한 명이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내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쪽으로 넘어오는 일이 벌어졌다. 쫓아오던 북한군 추격조의 총을 맞고 군사분계선에서 불과 50미터 떨어진 곳에 쓰러진 그는 유엔군 헬기로 수원 아주대병원으로 긴급 후송되었다. 그는 지프를 몰고 탈출하다가 남측 초소 인근까지 접근했으나 지프 바퀴가 도랑에 빠지면서 차량에서 내려 남측으로 넘어왔다. 이 과정에서 북한군 추격조로부터 총상을 입고 정신을 잃었다. 그의 탈출 영상뿐만 아니라 치료 경과와 내장 상태까지 전국으로 중계되며 많은 논란을 빚기도 했다.
그날 이후 숱한 언론으로부터 매일같이 인터뷰 요청을 받았다. 나도 십여 년 전 그 병사가 탈출해온 지역의 인근 비무장지대에서 복무했으며, 그와 비슷한 경로로 탈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론이 진실을 원한다기보다는, 그저 그를 이용하고 있다는 불온한 생각이 들었다. 한국사회에서 살아오면서 체득한 의심이었고 불안이었다. 나는 결국 언론의 인터뷰 요청을 모두 거절했다. 다만 그가 속히 깨어나기를, 그리고 훗날 그가 목숨을 담보로 경계를 넘어섰던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기를 바랐다.
나는 흔히 말하는 북한 출신의 탈북민이다. 남북한 간의 대립과 대치는 이곳에서도 ‘조난자’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처지임을 시사한다. 한반도는 분단 체제하에서 수많은 조난자들을 양산해냈다. 조난자들은 여전히 왜곡되고 피폐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통일을 이루지 않고서는 우리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잠재적인 조난자의 운명을 배면(背面)에 깔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책은 탈북민 한 사람의 고백이기도 하지만, 분단사회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 여러 구성원들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서문' 중에서/ pp.11~12)

열일곱 살이 되던 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에 입대했다. 아버지는 자신이 계셨던 공군에서 복무할 것을 바라셨지만, 나는 비무장지대를 고집했다. 지금은 사병 복무 기간이 10년으로 단축되었지만 당시에는 13년이었다. 통일을 향한 ‘성스러운 남진’(남한 진격의 길) 명령이 내려지면 군 복무를 안 해도 될 것이라는 다소 이상적인 생각도 있었다. 처음 접한 비무장지대의 풍경도 그러한 생각을 충분히 뒷받침해주고 있었다. 하루 24시간도 모자란 듯이 남북한은 서로를 향해 고성능 확성기로 심리전 방송을 내보냈고 비무장 지대 밖에서 쉼 없이 쏴대는 중화기의 사격 훈련 소리와 들짐승이 스치기만 해도 폭발하는 지뢰의 폭발음, 가끔씩 오발인지 도발인지 모르게 상대 구역으로 날아드는 적의 총탄 등은 바로 이곳이 일 촉즉발의 대결장임을 증명하는 듯싶었다.
('1장 스물두 살, 경계를 넘다' 중에서/ pp.17~18)

1961년 8월 13일, 위기의식을 느낀 동독 공산당은 소련의 지원을 받아 동~서 베를린을 연결하는 13개의 주요 도로와 80여 개의 거리에 철조망을 설치하고 베를린장벽을 건설하며 봉쇄에 들어갔다. 베를린 시민들은 눈앞에 벌어진 광경에 경악했다. 그러나 불과 이틀 후인 8월 15일, 동독의 군인이었던 한스 콘라드 슈만(Hans Conrad Schumann)이 분단선을 뛰어넘어 제일 처음 탈출했고, 28년 후 1989년 11월 베를린장벽이 붕괴될 때까지 2,000명이 넘는 장교와 병사들이 서독으로 목숨을 걸고 건너왔다.
콘라드 슈만은 냉전시대에 자유의 아이콘으로 상징되었으나, 그는 서독으로 건너간 후 오랫동안 우울증과 외로움에 시달렸고 독일이 통일된 후인 1998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나이 56세였다. 그는 유서를 남기지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 죽음의 이유를 알고 있다. 결국 그 역시 베를린장벽의 수많은 희생자 중 한 명이었던 것이다.
('1장 스물두 살, 경계를 넘다' 중에서/ pp.24~25)

군사분계선을 넘은 뒤 한국군 GP를 지나쳐 GOP로 신속하게 이동했다. 비무장지대 안에서는 남과 북 어느 쪽도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수년간 경험했기 때문이다. 군사분계선을 넘으면서부터 귀순 사실을 알리고자 허공에 총을 연발로 쏜 탓에 매캐한 화약 냄새가 전투방한복에 스몄고 냄새가 채 가시기도 전에 GOP에 도착하여 군홧발로 철책선을 찼다.
잠시 후 철책선을 가운데 두고 한국군 군인들과 마주섰다. 앳된 얼굴의 초소장은 신분 확인 후 무장해제를 요구했다. 비무장지대를 속히 벗어나고 싶은 나의 생각을 멈춰 세운 것은 예상치 못했던 초소장의 다음 요구였다. '입고 있는 방한복도 전부 벗어주세요.' 방금 헤쳐온 어둠길로 북한군 추격조가 들이닥칠 것만 같은 긴박 한 순간이었지만 차마 전투 방한복만은 벗을 수가 없었다. 포로가 아닌 귀순자라는 자존심뿐만 아니라 엄동설한의 비무장지대에서 초췌한 모습으로 벗겨지는 것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였다. 팽팽한 신경전이 흐른 뒤 초소장은 고집을 거두고 병사들에게 철책선 절단을 명령했고 나를 비무장지대 밖으로 인도했다.
('2장 사선을 넘어 또 다른 사건에 서다' 중에서/ pp.27~28)

하나원에서 퇴소해 허름한 임대주택에 들어섰을 때 나를 기다린 것은 먼지와 얼룩이 곳곳에 자욱한 작은 공간이었다. 고립감과 무기력이 밀려왔지만 이 상태를 속히 벗어나야 했다. 공중전화로 담당 경찰에게 전화했다. 수첩에 적어놓았던 은행에서 돈 찾는 법, 마트 이용법, 지하철 타는 법 등을 물어보자 수화기 너머로 조금은 피로한 듯한 목소리가 전해져 왔다. '나 혼자 사십 명의 탈북민을 담당하고 있는데 그중 어르신들이 절반이다. 이번에 새로 온 어르신들도 담당해야 하고. 너는 젊으니 혼자서 할 수 있는 것부터 먼저 해봐. 나중에 들를게.'
나는 북한에서조차 사회생활을 해본 적이 없었다. 군부대 지역에서 태어나고 자라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비무장지대에서 군 복무를 시작했고 휴전선을 넘어 이곳에 왔다. 다른 탈북민처럼 중국이나 제3국을 체류하거나 경유하면서 터득한 시장 경험도 없었다. 차라리 외계인에 가까웠던 나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홀로 절망과 싸울 채비를 해야 했다.
('3장 실업과 호구지책의 사이' 중에서/ p.38)

목숨을 걸고 비무장지대를 넘어온 나는 곧바로 ‘잉여인간’으로 전락했다. 북한에서는 한 번도 굶어본 적이 없었지만 남한에서 처음으로 굶어봤다. 생활비라도 벌기 위해 주유소에 찾아가 면접을 봤지만 퇴짜 맞기 일쑤였다. 구인 공고가 실린 지역생활정보지가 집 한편에 켜켜이 쌓여갔지만 탈북민을 받아주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특히 북한군 출신에 대한 날선 편견, 거기에 중국 동포보다도 어수룩하게 보이는 행동들로 인한 부정적 이미지가 더해져 나는 번번이 호구지책에 실패했다. 동네 꽃집 아저씨와 슈퍼마켓 아주머니를 도와 소일거리를 구했고 군에서 배운 독도법으로 일터를 찾아다니며 지리를 익혔다.
마침내 종로에 있는 일식당에 취직했다. 하나원에서는 '한국은 북한과 달라서 일한 만큼 돈을 벌 수 있다'라고 교육했고 나는 그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남들이 여덟 시간 일할 때 나는 열두 시간 일했다. 배달과 주방일 외에도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했다. 드디어 첫 월급봉투를 받은 날, 나는 내 눈과 귀를 의심했다. 동료들보다 더 일했음에도 월급은 그들보다 수십만 원이나 적었던 것이다. ‘노력과 대가는 비례한다’는 상식적인 논리조차 탈북민에게는 예외였다.
('3장 실업과 호구지책의 사이' 중에서/ pp.40~41)

대학 생활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경제적 어려움도 컸다. 생계 지원금으로 집세며 온갖 공과금을 내고 나면 교통비나 식비도 남지 않았다. 의지할 가족도, 도움을 받을 이웃도 남쪽 하늘 아래에는 없었다. 입학과 동시에 아르바이트를 시작해야 했고 첫 학기 성적은 최악이었다. 탈북민의 경우 사립대학 등록금은 국가와 학교에서 반반씩 지원하는데 성적이 나쁘면 이를 지원받을 수가 없다. 등록금을 스스로 해결해야 했던 나는 한 가지 아르바이트로는 도저히 등록금을 마련할 수가 없어 여러 일을 동시에 해야 했다. 호프집 종업원, 치킨 배달, 건설 현장 노가다, 촬영 엑스트라, 일식당 주방보조, 전단지 알바 등 닥치는 대로 일했다. 수업이 끝난 후 도서관으로 향하는 친구들을 보며 쓸쓸히 일터로 가야 했던 그 시절이 지금도 마음에 응어리로 남아 있다. 도서관에 앉아 공부하는 친구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현재 전국의 대학에서 공부하는 탈북민 청년들이 눈에 밟히는 이유도 그 시절의 기억 때문일 것이다.
('4장 대학, 청춘의 죽음' 중에서/ pp.51~52)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탈북민의 흔적을 깨끗이 지우고 입사 지원을 했다. 그때부터 기적과 같은 일이 벌어졌다. 서류를 제출한 지 몇 개월 되지 않았는데 줄줄이 합격통지서가 날아왔던 것이다. 1차 서류합격만으로도 기쁨을 느낀다는 ‘서류가즘’이라는 신조어도 있지만 나에겐 그 따위에 비교할 수 없는 감격이었다.
그러나 기쁨은 잠시, 격한 슬픔과 비애가 온몸을 감쌌다. 민주주의의 발전과 성숙한 의식 수준을 자랑한다는 한국에서 탈북민이라는 이름은 경쟁사회의 아웃사이더이자 분단사회의 주홍글씨와 같은 꼬리표였던 것이다. 사람들은 과거에 비해 많이 좋아졌다며 백안시하는 태도를 애써 감추려 하지만, 실제 모습은 제도와 시스템 속에 철저히 내재화되어 있었다. 여기에 물질과 이기의 논리가 덧칠해져 유사한 얼개로 괄시와 배척이 가중된다.
('5장 미생의 삶, 경쟁사회의 아웃사이더' 중에서/ pp.59~60)

나의 탈북 노정은 고작 25분에 불과했지만, 그날 착종된 트라우마는 십 년 넘게 나를 괴롭혔다. 초기에는 눈을 감으면 악몽이, 눈을 뜨면 현실이 두려워 바깥출입을 거의 하지 못했다. 이는 극복했지만 지금까지도 비무장지대의 한가운데에서 지뢰를 밟고 서 있는 고약한 악몽만큼은 계속 따라다닌다. 어느 정도 면역력이 생겼다고 생각하는 편이지만, 고통받는 탈북민의 삶을 언론이나 일상에서 마주할 때마다 분단의 통증을 앓는다. 어쩌면 탈북한 이후에도 북한과 통일 문제에 천착한 대가일 수도 있을 것이다.
오직 살아야겠다는 절박함으로 비무장지대를 건너 기적적으로 생존했다. 그리고 오늘 나는 또 다른 오기와 갈급함으로 하루하루를 마주한다. 그것은 바로 통일이다. 단순히 북한이 고향이어서가 아니라, 통일 문제 연구자로서가 아니라, 남북의 분단 체제를 모두 살아낸 경험자로서, 한반도에 존재하는 수많은 조난자 중 한 명으로서 통일을 열망한다. 그리고 그 통일은 소수가 원하고 다수가 외면하는 불가해한 허상이 아니라, 기형적인 분단 체제 안에서 살아온 남북한 사람들 모두를 비정상적인 삶에서 벗어나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
('7장 25분 만에 귀순하여 십 년 만에 쓴 박사모' 중에서/ pp.83~84)

탈북 병사의 키와 몸무게, 영양 상태까지 다루며 상업주의를 되풀이하던 언론은 급기야 '근육질의 몸매와 현빈을 닮은 병사'라는 새로운 신변잡기로 선정적 보도를 이어갔다. 결국 국방부와 의료진은 공로를, 언론은 시청률을 챙겼지만, 탈북 병사는 인격을 잃었다. 이 사건 이후 어떤 이들은 탈북민과 함께 식사하는 것조차 꺼리기도 했다.
한국정부와 의료진은 총상을 입어 사경을 헤매는 탈북 병사를 신속하게 치료했고 적절하게 보살폈다. 다만 그 다음이 문제다. 그의 이름과 신상, 건강 상태가 과도할 정도로 언론에 노출되는 과정에서 그의 인격과 존엄은 정치적 목적에 의해 의도적으로 방기되었고, 언론은 이를 이용하여 장사를 했다. 탈북 병사의 삶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사회라는 새로운 사선 앞에 놓이게 될 것이다. 개인정보가 공개된 그는 온갖 혐오와 편견에 맞서 위태로운 싸움을 다시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 분단의 슬픔은 이 지점에서부터 거듭 시작된다.
('9장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 중에서/ p.105)

옛 소련의 해체를 예언했던 정치학자 요한 갈퉁(Johan Galtung)은 '전쟁이 끝난다고 평화가 찾아오는 게 아니며 그다음에 찾아오는 것은 전쟁보다 더 잔인한 것일 수도 있다'라고 했다. 어쩌면 한반도에 도래할 통일은 또 다른 갈등의 시작일 수 있다. 서로를 적대하고 증오해온 춥고 어두운 분단사와 불신의 악순환이 통일 이후 거칠게 드러날 개연성이 크다.
단언컨대 민족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마지막 동력은 통일에서 확보할 수밖에 없다. 나는 통일에 대한 관심과 열망이 다시 타오르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그 통일은 한밤중에 얻는 ‘대박’보다는 시나브로 ‘작은 통일’이 모여 결실을 맺는 끈기와 인내의 열매여야 한다. 제대로 된 통일을 분별하지 못하다가는 민족의 웅비와 미래를 보장받을 수 없다는 점을 깨달아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이다.
('10장 통일,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소원' 중에서/ p.115)

북한에서 74년, 한국에서 13년의 파란만장한 삶을 보냈던 황장엽은 2010년 10월 10일 논현동 자택 욕실에서 생을 마감했다. 마침 그날은 북한의 노동당 창건 65주년이 되는 날로, 북한은 성대한 기념식을 통해 김정은의 세습을 생중계로 대내외에 공식 천명했다. 북한의 최고 권력 세습 문제를 날카롭게 비판했던 그가, 그 세습이 공식화되는 날에 숨을 거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북한은 '배신자의 운명'이라는 제목의 논평을 내고, 그의 죽음을 두고 '하늘이 내린 저주' '비참한 최후'라고 독설을 퍼붓고 조롱했다. 한국 정부는 그에게 무궁화장을 추서했고 국가보훈처는 고인을 현충원에 안 장하기로 의결했다. 그러나 주체사상을 창안하여 분단 체제를 공고히 한 그를 국립묘지에 안장하는 것을 비판하는 이들로 한국사회는 한동안 소란했다.
그의 장례가 치러지던 현대아산병원 장례식장에서 나는 꼬박 이틀을 보냈다. 그와의 인연이 특별해서라기보다는 가족 없이 떠나는 이가 있다면 누구든 그 옆에 함께 있어줘야 한다는 평소의 생각 때문이었다. 고인을 둘러싼 이념 논쟁과 색깔론은 영결식 날까지 계속되었다. 그가 현충원의 국립묘지로 안장되는 날 아침, 홀로 택시를 탔다. 얘기하지도 않았는데 택시 기사가 황장엽의 장례식장에서 온 거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짧게 대답한 후 뒷좌석에서 잠이 들었다. 그가 어떤 일을 했고 어떤 길을 걸었는지에 대해서는 훗날 역사가 평가할 것이다. 그때까지 우리의 판단은 잠시 유보하는 것이 어떨까.

사랑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고 가나
걸머지고 걸어온 보따리는 누구에게 맡기고 가나
정든 산천과 갈라진 겨레는
또 어떻게 하고
- 황장엽이 사망한 후 공개된 유작 시 중에서
('17장 1990년대: 황장엽, 비운의 망명객' 중에서/ pp.181~182)